[제8차 포럼] 국학과 역사 -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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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의 입장에서 본 우리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

 

김동환 ([사]국학연구소연구원)

 

 

1. 역사의 의미

 

  역사란 인간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본디 역사라는 말은 영어로는 history, 프랑스어로는 histoire, 그리고 이탈리아어로 storia로 나타난다. 그것의 유래는 고대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다. 기원전 6-5세기 무렵 그리스의 이오니아 사람들이 탐구investigation?조사inquiry라는 뜻하는 말로 사용한 historia가 그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조사?탐구를 통한 기록의 의미를 갖고 있다.

  까닭에 역사는 탐구?조사의 대상이 되는 과거의 시간과, 그것을 통해 해석?정리하는 현재의 시간이 늘 교차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시간이다. 또한 역사는 일정한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적 공간을 외면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인위적?물질적?자연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역사는 단순한 학문을 넘어, 시간 속의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즉 역사는 역사의 주체인 인간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역사는 역사적 시간?공간 그리고 인간을 소중히 하는 학문이다. 신채호가 역사를 “시간적 繼續과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으로 정의하면서, 시(時)와 지(知)와 인(人)을 역사 구성의 3대요소로 본 것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을 외면할 수 없는 역사의 속성을 바로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시간은 자연적인 시간과 체험적인 시간이 결합되어 체계화된 개념이다. 즉 인간활동사에 대한 시간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시간이란 온갖 현상이 그 안에 담겨있는 혈장(血漿)이며, 이들 현상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해주는 보관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역사적 시간이란, 현재 살아 있는 인간을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가 늘 교차하므로 현재라는 시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판단의 기준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 시간은 연속성을 갖는다. 그것은 끊임없는 변화이기도 하다. 시간이 갖는 이 두 특질의 대립으로부터 역사연구의 중요한 문제들이 생겨난다. 그것은 곧 계속 흘러가는 연대 가운데서 명확히 구분되는 두 개의 연속된 시기이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이 두 시기 사이에 설정된 관련성이, 시간 자체의 경과에서 생기는 차이보다도 어떤 때는 많아지고 어떤 때는 적어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가장 오래된 사물에 대한 인식이 가장 새로운 것의 이해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불필요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인정하느냐로, 역사가는 번민할 수밖에 없다.

  역사에 있어서 공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장소로서, 그 삶의 제반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콜링우드는 자연과 인간의 역사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자연의 과정은 단순한 사건들의 연속이며, 인간의 역사는 행위의 과정인 동시에 거기에는 사고의 과정들로 이루어진 내적인 측면이 있고, 역사가는 그것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자연계는 오랜 시간에 걸친 변화의 과정이 있고 그것이 인간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지만, 역사의 인식 주체는 인간이므로 역사는 마땅히 인간의 역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간이란 생존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니이체가 말하는 몽유인과는 다르다. 니이체는 현재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삶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에만 집착하거나 미래에만 매달리는 몽유인을 역사적 인간이라 불렀다. 그러나 니이체의 그것은 역사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시간과 관련된 철학적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적 인간이란 역사를 영위하고 기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없으면 역사도 없고 기록도 있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위하는 모든 것은 역사의 산물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 역시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역사란 인간활동사를 담은 시간적인 요소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인위적?물질적?자연적 환경이라는 공간적 요소, 그리고 역사를 영위하고 기록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결합된 자취의 기록이라 정리할 수 있다.

 

2. 역사의 관념성

 

  역사적 시간의 특징 속에서는 역사가의 시간적 무게중심에 의해 객관과 주관, 사실과 이해가 경합하게 된다. 근대 역사학의 확립자 랑케는 “역사가란 자기 자신을 죽이고 과거가 본래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를 밝히는 것을 그 지상과제로 삼아야 하며, 오직 사실로 하여금 이야기하게 해야 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역사적 사실들, 그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다. 랑케의 입장에 의하면 역사에 있어서의 진실은 사실 그 자체가 지니는 진실이며, 마찬가지로 역사의 의미도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충분하게 수집되고 잘 기록되어있는 사실들이다. 역사는 그 사실들로부터 제 스스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인, 특히 철학적인 성찰은 불필요하고 심지어는 해롭기조차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성찰은 실증과학에 억측이라는 요소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랑케의 역사연구 방법론은 많은 측면에서 후대의 역사학에 영향을 끼쳤다. 리처드 에번스는 랑케가 후대의 전문 역사학에 끼친 점을 크게 세 가지로 파악하였다. 첫째, 역사학을 철학이나 문학에서 독립된 별개의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것과, 다음으로 과거는 현재의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고 그 자체의 맥락에서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역사주의적 측면을 확립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고대 및 중세 문헌 연구에서, 당시의 문헌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방법을 근대 역사학의 연구에 도입하였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한편 랑케의 접근과는 정반대되는 역사인식론이 금세기에 B. 크로체나, R. G. 콜링우드에 의해 나타난다. 즉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contemporary history다"라는 관점과, "모든 역사적 판단을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천적 요구이기이기에, 모든 역사에는 현대의 역사라는 성격이 부여된다. 서술되는 사건이 아무리 먼 시대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역사가 실제로 반영하는 것은 현재의 요구 및 현재의 상황이며, 사건은 다만 그 속에서 메아리 칠 따름이다."라는 글들에서 보듯이, 역사란 본질적으로 현재의 눈을 통하여 현재의 문제의 관점에서 과거를 본다는 데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까닭에 역사가의 비중이 크다는 말이다.

  E.H. 카는 그 중립에 섰다. 중심을 과거에 두는 역사관과 중심을 현재에 두는 역사관의 중간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카에 있어 역사가는 사실의 천한 노예도 아니오, 억압적인 주인도 아니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맞추어서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맞추어서 해석을 형성하는 끈임 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다. 역사란 결국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 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주장이다.

  실증주의 역사학의 선구자였던 랑케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노력은 바로 종교적인 것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신 없이는 아무것도 없으며, 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살지 못한다고 알고 있다. 얼마간 편협한 신학의 요구는 뿌리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노력이 높은 경지의 종교적 근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고백한다.”

 

  랑케는 자신의 이러한 역사방법론을 과학적인 것으로 믿었으며, 랑케 사학의 이러한 방법론은 지금까지도 역사연구의 기본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 랑케가 사실 그 자체의 엄격한 추구만을 목표로 했던 역사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랑케에게 있어서 개별 사실의 객관성은, 더 큰 객관성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했다. 더 큰 객관성이란 신의 의지가 역사에서 작용하는 과정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랑케는 역사 연구에서 신의 의지를 파악하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더욱더 역사연구의 객관성을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랑케가 보기에 신의 손길이 역사에 작용하는 과정을 순수한,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물의 전개에 대한 자신의 판단중지 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판단도, 관념과 사실이 교차하는 그의 사고를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오히려 랑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실증주의적 역사가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철학적으로 볼 때,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는 실재론의 입장이었으나, 형이상학적 측면에서는 관념론의 입장에 서며, 그것도 역사의 궁극적인 실체로서의 신의 실재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객관적 관념론의 입장에 선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역사가의 고민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민중의 빈곤으로부터 찾았던 미쉴레Jules Michelet의 “현재에만 자신을 닫아두려는 사람은 현재의 진면목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한 말을 상기해보자. 현재를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과거를 성찰해야 한다는 의미다. 까닭에 마르크 블로흐는 인간에 속한 역사가의 눈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금방 눈에 뜨이는 풍경이나 연장?기계 따위의 너머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차디차게 식은 듯한 문서나 그것을 확립해 놓은 자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는 제도의 너머에서, 역사학이 파악해 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들이다. 거기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는 기껏해야 생명력 없는 잡다한 지식을 다루는 엉터리 학자에 머물고 말 것이다. 훌륭한 역사가란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食人鬼)와 흡사하다. 인간의 살냄새를 맡게 되는 바로 그곳에, 자신의 사냥감이 있음을 그는 아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규정 속에 역사적 진보와 관련된 지침이 숨어있다는 점이다. 역사기록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함도 이것과 관련된다. 문제의식을 품고, 왜 그렇게 기록되었는가에 대한 고민을 통하여 과거 기록들을 살펴볼 때,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지침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거에 대해 인식하면서 자기 정체성, 과거와의 연속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는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해석의 대상이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에 의해 살아 움직이고, 미래를 위해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실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다 분명한 미래를 위해 우리는 현재의 터에서 과거를 부단히 직시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실체적 접근은 당대적 삶과 미래적 삶의 방향성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사항이다. 역사는 미래의 투쟁이라는 말도 이러한 인식 위에 성립한다. “역사학에 대한 어떠한 해석이든 그것이 확고한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만 비로소 학문으로서 제 구실을 할 수가 있는 법이다. 역사적 진실에 충실하는 것,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일깨워 주는 것, 이것이 역사학자로서 민족을 사랑하고 현실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라는 외침이, 시대의식을 외면하려는 실증사학자의 용기 없는 변명처럼 들림은 무슨 이유일까.

  이것은 해방 후 한국사학이 실증적인 면에서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하겠지만, 사론적(史論的) 측면에서의 연구는 절대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즉 사관(史觀)의 부재 혹은 ‘탐구로서의 역사’가 없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실증주의사학은 하나의 학풍을 이룬다기 보다는 역사학 연구의 기초조건으로서의 그 본래의 기능에 한정되어 가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실증의 과정을 겪지 않는 역사연구가 있을 수 없지만, 실증만으로 끝나는 역사연구도 의미가 없기 때문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다. 분명 역사는 각 시대 간의 연대성이 매우 공고하기 때문에, 시대 간의 방향은 두 방향에서 작용함을 간과해선 안된다. 현재에 대한 몰이해는 과거에 대한 무지에서 빚어진 필연적인 결과다. 또 역으로 현재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과거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전혀 결실 없는 노력에 그칠 것이다. 이병도 역시 이것을 모른 것이 아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역사는 단지 사실의 기록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史料와 사실을 검토하고 비판하고 사색하여, 사회생활의 각 相異한 시대 간에 존재한 인과적인 관련과 緣起性을 밝히는 동시에, 그 裏面 혹은 그 以上에 드러나 있지 않는 어떤 의의와 법칙과 가치를 발견하면서, 항상 새롭게 관찰하여야 한다.”

 

  그 또한 사실의 기록만을 외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사실에 대한 비판과 검토, 인과적 관련성과 연기성에 대한 구명, 그리고 어떤 의의와 법칙과 가치에 대한 발견을 중요시했다. 그리고 역사가의 새로운 관찰의 눈을 요구한 것이다. 다만 그의 관찰의 눈은 일제관학에 부용(附庸)했던 어용의 눈을 벗지 못한 것이 한계다. 주인의 눈을 잃어버리고 손님의 안경을 쓰고 우리 역사를 탐조했던 것이다. 그의 선택이 우리의 역사를 슬프게 만들었다. 이것은 역사가의 선택이 현재의 역사의식을 좌우하고 나아가 미래의 삶까지도 규정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부분이기도 하다.

  함석헌이 역사가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했던 소동파의 「여산(廬山)」이라는 시를 보자. “橫看成嶺側成峯/處處看山(遠近高低)各不同/不識盧山眞面目/只緣身在此山中” 함석헌은 이 시에서, 역사의 생명은 소재로써의 사실보다도 사실의 의미를 붙잡는 해석에 있음을 파악하고 있다. 다양의 현상 밑에 전일적(全一的) 정신을 파악하는 해석은 어떤 관점이 결정되고서야 가능하다 한다. 소동파의 「여산」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관점이 변함을 따라 그 보이는 바가 각자 다르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혁명을 조선의 사가(史家)가 보면 건국이지만, 고려사가의 눈으로 보면 탈국(奪國)이다. 다른 말을 할 것이 없이 예수의 십자가까지도 복음적 입장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승리지만, 세상적 입장에서 보면 30청년의 실패사의 종막(終幕)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진정한 역사이기 위하여는 몸을 여산중(盧山中)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일목하(一目下)에 모든 산의 모습을 두루 취할 수 있는 위치에 두는 것 같은, 어떤 입장에서 세계를 조감(鳥瞰)하면서 쓴 것이어야 한다. 함석헌은 이를 가리켜 사관이라 한다. 사관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요, 사관에 도달하지 못하는 독사(讀史)는 무용(無用)의 도로(徒勞)라는 것이다.

 

4. 왜곡된 史眼의 폐해

 

  국학적 입장에서의 우리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먼저 과거 우리의 눈을 멀게 했던 중화주의(中華主義)적 역사관을 벗자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난도질한 일제 식민지사관의 흔적을 씻어내자는 것이다. 또한 현금 대두되고 있는 지나친 종교사관적인 해석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일찍이 신채호도, 고구려 이문진의 『신집(新集)』과 백제 고흥의 『서기(書記)』그리고 신라 거칠부의 『국사(國史)』가 전하지 않음을, “역사의 靈이 있다면 처참한 눈물을 뿌릴 일이다”라고 한탄한 바 있고, 묘청의 난이 김부식에 의해 진압되면서 우리 민족이 모든 분야에서 중국의 노예가 되었다고 개탄한 바 있다. 그러나 조선조 수서령(收書令)을 통해 압수된 수많은 신교사서(神敎史書)들의 유실은, 민족사의 줄기로 보면 한탄을 넘어 대성통곡할 사건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제 역시 한민족의 문화적 동화정책의 관철을 위하여, 그 교육방법에서도 지능적이고 간교한 수법을 모두 동원하였다. 소위 「同化의 手法」의 요령을 요약해 보면, 조선인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의 빛나는 과거의 역사?전통?문화를 모르게 하는 동시에, 될 수 있는 대로 조선민족이 겪은 역사상의 치욕적인 사실과 그들의 조상?先人들의 無爲無能한 행적이나 악행 내지는, 폐풍 등의 사례(예컨대 외침을 당하여 항복한 수난사,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사실, 당파싸움을 한 사례)등을 들추어내어 과장하여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자국의 역사와 조상?전통?문화에 대하여 경시 내지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자국의 모든 것에 대하여는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여 혐오증을 가지게 될 때에, 서서히 미화?과장된 일본의 역사와 전통?문화?인물?사적 등을 그들에게 가르쳐주면, 자연히 그들이 일본을 흠모하게 되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니, 이것이 제국일본이 문화적으로 조선인을 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이 된다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일제는, 우리 역사의 뿌리가 되는 단군사 관련 부정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내세우고 있다. 먼저 단군기사(檀君記史)는 날조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논리다. 그 수록된 내용이 불교적으로 윤색되어 황당무계하고, 몽고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승도(僧徒)들이 날조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의 관찬사서로서, 그 저술연대가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관한 기사가 일절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측의 고대(古代) 기본사서에도 단군과 관련한 내용이 발견되지 않음을 들고 있다. 공교롭게도 우리 기득권사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제의 식민지사관에 의해 강조된 한국사의 변개 부분의 대표적 실례는 다음과 같다. ① 단군에 대한 사실을 부정하고 의식적으로 기자를 먼저 내세워 한국사의 주체성을 부정했다. ② 한국사의 시대 구분에 있어, 특히 낙랑군시대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써 중국의 피지배시대임을 강조했다. ③ 신라?백제의 실제 건국을 4세기 이후로 미루어 노골적으로 우리 역사의 후진성을 강조했다. ④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백제?신라가 강성한 후에도 옛 삼한지역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던 나라는 일본이었다고 주장했다. ⑤ 외세의 한민족 지배를 강조하는 것만큼, 한민족의 대외 전쟁 승리는 과소평가하거나 그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러한 서술 행태 속에서는, 한국의 국가적 기원은 단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것은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역사의 상한선을 가능한 한 끌어내리고 있다. 한국문화의 발전은 바깥 문화의 모방과 그 유입에 의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외세의 침략이 강조되고 그 퇴치능력은 크게 평가되지 못한다. 따라서 외세에 대한 사대주의를 크게 부각시킬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지금 우리의 역사인식이 위와 같은 가치의 연장이라는 점이다.

 

5. 종교사관의 문제

 

  이 시대의 종교사관도 문제다. 유교적 가치로 포장된 『삼국사기』의 아픔과, 불교적 이념에 함몰된 『삼국유사』를 경험한 우리는 더욱 그렇다. 현금의 모종교에서는 단군을 기록한 『삼국유사』는 역사서가 아니라 한다. 즉 『삼국유사』는 개인이 편집한 이야기책으로,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문제는 다음과 같이 종교적 가치에 의한 판단이, 일제의 식민지사관의 안목과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단군은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신화라는 말은 원시적인 세계관과 원시적인 인생관에 기초를 둔 神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官撰史書(국가에서 발행하는 역사책)인 『삼국사기』에는 단군에 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 단군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화다.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라면, 기원전 2333년 동안 나라가 지속되었고 단군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찌하여 역사적 유적과 유물이 없으며,(기껏해야 1994년 11월 북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는 조작된 이야기 뿐)  『삼국유사』보다 140년 앞서서 발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 역사책인 『삼국사기』에 왜 언급이 없다는 말인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역사인식이다. 우리가 극복하려고 그렇게 노력해 왔고, 또 노력하고 있는 극복대상의 논리를, 종교라는 명분으로 긍정하려는 것이다. 즉 중화주의적 사대사관(『삼국사기』의 인식)이, 일제 식민주의사학자들에게 그대로 이용되고(단군 실존 부정), 그러한 역사인식이 이 시대 종교적 가치에 의해 그대로 주창된다는 것이다. 종교적 도그마에 의해 민족의 역사가 부정될 수는 없다. 김구의 다음과 인식이 그 해답이다.

 

“나는 공자?석가?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며, 피와 역사를 같이 하는 민족이란 완연히 있는 것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 저 민족이 될 수 없는 것은, 마치 형제도 한 집에서 살기 어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종교와 민족은 별개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교리와 국사도 구별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학계에서 “종교는 인류가 역사를 이루고 문화를 구성하고 살 때에 뚜렷하게 나타나는 인간생활의 한 현상으로써, 어디서나,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인간 활동의 하나다.”라는 보편적 종교현상을 긍정하듯이, 종교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국사에 대한 존중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랑케는 헤겔의 세계사 이론에 반대 입장을 취하여 역사라는 것은 초월적인 어떤 개념으로서 저술될 수 없고, 정치적 실용적인 의도에서 저술되어서도 안 된다 했다. 특히 역사는 정사(正邪)?선악(善惡)이라는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역사는 여러 사실이 상호 관련되어 전해 온 내용 그 자체를 공정하게 저술해야 하며 각 시대에 대해서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해야한다는 견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사관을 내세웠던 함석헌도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비교적 관계가 깊은 기독교의 성경에 나타나 있는 사관을 간단하게 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홀로 참종교라는 생각에서도 아니요, 기독교에만 참사관 있다 하여서도 아니다. 전날에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와서 보면 역시 종파심을 면치 못한 생각이었다. 기독교가 결코 유일의 진리도 아니요, 참사관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진리가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식으로 나타났을 뿐이다.”

 

  즉 함석헌이 말하고자 하는 종교적 사관은, 본인이 본 성경의 사관을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사관만이 참사관이라는 것은 종파심이라고 했다. 여타 다른 종교적 사관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국사와 종교사를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도 암시하는 말이다.

 

6. 史書有感

 

“我國을 亡하는 자는 政論도 아니며, 學制도 아니오, 幾百年來 妄筆을 揮한 奴史家가 是라.”

 

  이것은 신채호가 한탄한 말이다. 나라를 망치는 것이 다름 아닌 노예의 사필(史筆)임을 일깨우고 있다. 역사가와 함께 사관의 중요성도 새삼 와 닿는다. 우리 역사의 비극은, 일제가 유교적 『삼국사기』를 최고(最古)의 역사서이자 사료(史料)로 자리매김한데서 연유한다.(그나마도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인정하지 않음) 또한 일제가 사설(史說)로써 매도한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역시 우리의 역사를 정관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크다.

  살핀 바와 같이 일제는 조선인의 역사 정신을 근본적으로 말살시키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또한 그 일환으로 20만권이 넘는 우리의 사서를 수집했다. 문제는 일제가 왜 『삼국사기』와 『제왕운기』?『삼국유사』를 왜 남겨놓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한마디로 일제식민지사관에 부용논리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서들 모두 우리 국학적 입장에서의 사관, 즉 신교사관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노예의 역사로, 일제는 또다시 우리를 노예의 수렁으로 몰아갔다. 일제의 학문적 이이제이(以夷制夷)가 그대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 23년에 간행된 기전체(紀傳體)로 된 역사서다. 그 이전에 이미 『삼국사』라는 역사서가 있었다 하나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의 역사다. 까닭에 「신라본기」(1권-12권)를 맨 앞에 세웠다. 이어 「고구려본기」(13권-22권)와 「백제본기」(29권-31권)로 엮었다. 이러한 사관에서는 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대륙적 시각이 자연히 외면된다. 특히 삼국 중 신라의 건국연대를 가장 빠르게 잡은 이유도, 고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의식에 대한 의도적 설정이며, 고려가 신라를 계승한 국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함에 있어서 유교적 사관에 입각하여 기이한 사건들은 의도적으로 삭제했다.

  또한 『삼국사기』에는 중국 사서에도 적혀있는(『隋書』에 “位宮玄孫之子 曰昭烈帝”라는 기록이 보임) 고구려의 건원칭제 사실이 안 나타나고, 중국이 매번 책봉했다는 기록과, 중국에 조공을 올렸다는 기록들만으로 채워져 있다. 더욱이 『삼국사기』를 보면 『제왕운기』에는 나타나는 발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다. 그리고 고구려의 최전성기인 광개토태왕에서 문자명왕까지의 내용에 대해서도 너무 소략하게 다루고 있고, 우리 고대 강역에서 가장 중요한 패수와 평양의 위치를 잘못 비정하여, 우리 고대사의 강역을 실제보다 축소시켜버린 것이다.

  『제왕운기』 역시 유교적 이념 속에 나타난 역사서다.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기(1287)에 이승휴가 저술한 것이다. 그 구성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서사시로 읊고, 전적(典籍)의 기사(記事)를 자세한 주(註)로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다. 민족서사시로서 문학사적 가치도 높을 뿐더러, 다른 사서에는 전하지 않는 『단군본기(檀君本紀)』와 같은 각 본기와 『수이전(殊異傳)』?『구삼국사(舊三國史)』의 기사를 싣고 있어, 역사서로서도 사료적 가치가 높다. 주목되는 것은 단군 관련의 기록이다.

  불교적 『삼국유사』와는 달리 유교적 합리성을 토대로 단군사화를 엮고 있다. 우리가 천(天)과 연결되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민간신앙이나 고기류(古記類) 등을 통하여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한국사체계 속에 비로소 편입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과시한 것이다. 특히 『제왕운기』에는 ‘모든 단군(皆檀君)’이라는 표현이 나와, 단군이 고유명사가 아닌 복수개념으로서의 보통명사였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여 고려 태조에 귀순해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킨 의미가 크다. 그것은 만주일대까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것이며, 영토회복의 의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제왕운기』도 일제의 손을 탓을 가능성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영인본 간행이 1939년 9월에 경성(서울)에서 조선고전간행회 명의로 발간된 것이 시초였다. 이것은 『제왕운기』가 일제하 일본인들에 의하여 새로이 영인 간행되었다는 말과 같다. 비록 원본이 1287년에 만들어졌을지라도, 1939년에 새로 고쳐 쓰고 영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일제의 왜곡의 흔적이 농후하다는 추측도 이런 점에서 대두된다.

  일연은 김부식의 유교사관에 반기를 들고 불교적 시각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했다. 『삼국유사』는 그 서명이 말해 주듯,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사실들을 수록한 것이다. 그 구성을 보면,  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의 9편으로 짜여져 있다. 그 중 7편이 불교관계 기사다.

  흥법은 불교의 전래 과정 수용과 불교의 융성과 고승들의 행적 기록한 것이다. 탑상은 탑과 불상 및 사찰의 유래 이야기를 적은 것이며, 의해는 신라의 뛰어난 학승과 율사들의 전기를 적었다. 또한 신주는 밀교?신승들의 이적(異蹟)에 관한 이야기며, 감통은 주로 불교적 신앙의 감흥과 영험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던 승려들의 아름다운 자취를 기록한 피은과 불교적인 선행과 효도에 따른 보답을 적은 것이 효선이다. 심지어는 단군사화에 나오는 환인을 불교의 제석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불교사관의 모범적인 예다. 『삼국유사』를 제석사관의 역사서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부에서는 불교관계의 서술이 많은 특징을 가진 것 외에, 『삼국유사』는 강한 민족의식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서로 평가한다. 일연이 살았던 시대는 몽고병란 직후였다. 병란을 겪으면서 고려는 강한 민족적 자각이 일깨워주었다는 측면에서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 달리 첫머리에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본말을 뒤집어 우리 역사를 창업한 주인공들을 온통 불교 관련 인물로 윤색시켰다는 비판은 결코 비켜갈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국(桓國 혹은 桓因)을 제석(帝釋)으로 바꾸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