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차포럼] 이어령장관 [한국말에서 찾는 새로운 문명의 길]
조회:
첨부파일:
 

제 6차 한민족미래포럼

 

한국말에서 찾는 새로운 문명의 길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전통문화라 할 때  사실 어디까지가 전통문화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보더라도 다양하다. 남쪽에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룬 가야문화가 있고 또 지금 경주의 일부문화는 전부 남방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일부는 기마족으로 소위 몽골 중 신몽골, 바이칼로부터 유입된 사람들도 있다. 요즘 유전자를 검사해보면 그 루트를 다 알게 된다. 일본, 중국 저 밑에까지 전부 우리의 조상들이 걸어온 흔적이 있다. 그래서 전통문화라고 얘기하면 참 힘든 것이 사실이다.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고 생활양식에서도 다르다.

 

북한과 남한은 분단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민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하다. ‘말’이란 것이 그렇다.

 

시간적인 차이가 없다고 치고 우리가 신라인, 고구려인 백제인을 만났다 해도 말이 통한다. 즉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공동체의 ‘말’을 중심으로 보면 그 안에 전통문화가 들어있다. 우리가 세 살 때부터 어머니한테서 배운 소위 모국어를 통해서 우리 전통문화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살아있고 앞으로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이냐가 오늘 강의의 주제이다.

 

우리 ‘말’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를 알고 현재와 미래를 논할 수 있다

 

‘한국말’이라 할 때 한국은 한자말이고 말은 우리 순수 토착어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한글이라 부르는 것과 같이  ‘한말’이라고 하자는 운동을 하는 분도 있다. 이것은 우리의 복합문화이다. 순수한 민족문화이면서도 다른 나라 문화와 우리 문화들이 섞여서 몇 천 년을 살아왔고 여러 민족들이 또 어울렸지만 순수한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의 한민족이라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 그 비밀 속에서 왜 한국어가 아닌 한국말이라고 하는지 그 속에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 문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배타적이냐 포용적이냐 이항대립으로는 찾을 수 없는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생각해보자.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말에서 생은 한자말이다. 삶, 생, 그것은 살아있는 가장 가까운 말인데 순수 토박이말은 삶이고 한자는 생이다. 생자는 싹이 돋아 오르는 형상을 그린 것이다. 식물적 발상을 한 것이다. 동양은 대게 식물에서, 서양은 동물에서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삶, 젊음에서와 같이 받침 ㄹㅁ(리을 미음)자 붙은 게 이것이 문제다. ㄹㅁ(리을 미음) 자 들어간 것이 약자이다. 이 삶을 한글로 써 놓으면 ‘삶’ 속에 사람이란 글이 들어있다. 그런데 ‘삶’이란 글자를 써놓고 사람이라고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홍’자를 누가 못 읽나? 그냥 홍이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홍을 못 읽고 ㅎㅎ(히읗, 히읗)이라고 읽기도 한다. 홍자를 위아래로 보면. ㅎ과 ㅎ 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홍이라고 읽으니까 그렇게 읽히지, 다르게 보면 ‘ㅎ’ 두개가 포개 놓은 것으로 읽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해서 모르고 있는 우리문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새로운 문화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그것이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말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면

전통을 지키면서도 다양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가능성이 열린다

 

‘삶’이라고 하는 고요한 말속에서도 사람을 읽을 수가 있다. 여러 가지 새로운 것을 읽을 수 있다. 전통 문화라고 해서 하나의 문화만 지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전통 속에서 바로 미래의 자원을 꺼내는 것이다.

 

사우디 같은 곳은 땅을 파야 자원인 석유가 나온다. 대부분 산업주의라고 하는 건 땅속에서 부를 가져왔다. 석탄이라든가 우라늄이라든가. 그런데 한국의 부전자원이라는 것이 북한은 몰라도 남한은 아무리 땅을 파 봐도 화강암 정도 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땅속을 파야 겨우 살아가는데 한국 사람은 땅 안파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었다. 한국인의 자원은 가슴하고 머릿속에 다 묻어 두었기 때문에 이걸 파야 되는데 자꾸 엉뚱하게 석유 시추만 하려고 다니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마음과 머리 속에 엄청난 자원들이 들어 있는데 이걸 안파는 것이다.

 

삶이라고 할 때 서양에는 life라는 말과 living이라는 말이 있다. living은 먹고 자고 입는 수단, 의식주衣食住를 말한다. 그러면 먹고 입고 잠자면 사람은 사느냐? 그것은 아니다,

 

산다는 것은 ‘의식주衣食住’의 삶도 있지만 ‘진선미眞善美’ 진실한 것, 착한 것, 아름다운 것도 있다. 서양에서는 그걸 보통  life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은 life와 living이 구별이 안 된다.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고대 서양은 의식주를 존중하지 않았다. 그것은 짐승들도 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진선미를 추구해서 사람답게 사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먹고 자고 입고하는 수단을 해서 뭐하겠냐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 여자, 어린아이, 외국인 포로들, 이런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시키고 보통 폴리스의 시민들은 소위 피시스(physis 자연학)와 노모스(nomos 인위적 법률)라고 해서 자연 철학이라던가 인간들이 만드는 제도의 법률, 이런 것을 했다.

 

오늘날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의해 이루어졌다. 심지어 화이트 헤드(white Head) 는 “서양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데 시몬느 베이유(simone weil)는 “플라톤이 모든 것의 선각자고 인류의 모든 철학에 앞섰지만 딱 하나 노동, 노동의 가치가 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떤가? 거꾸로 의식주가 모든 걸 규정한다. 가령 대통령이 외국에 나가도 세일즈를 하러간다. 국민이 먹어야 사니까. 희랍 때만 하더라도 정치 지도는 인류를 끌고 나가는 진선미를 추구하는 타우마제인(taumazein 생의 기쁨)이지 먹고 자고 입는 거는 천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외국 노예들을 데려와서 다 시켰다.

 

서양은 프랑스 혁명 이후 산업주의 사회로 오면서 노동가치가 모든 전면에 나서니까 거꾸로 Life보다는 living을 찾는 이것이 오늘 대세를 이루고 있다. 정치, 경제 다 living이다. Life 얘기하는 사람 없다. 예술가들과 종교인, 철학자나 대학교 교수들이 life 얘기하지 보통 사람은 먹고 사는 이 living에 속한다.

 

서양의 live이라는 말을 뒤집어 보면 evil(이블)이 된다. 악이 된다. Live 용어를 과거분사 lived로 만들어 뒤집으면 Devil 악마가 된다. 그래서 서양에서 live 산다는 말속에는 악과 악마가 숨어 있다는 농담들을 한다.

 

우연인진 몰라도 인간이 생존한다는 것은 정말 악이고 악마고 우리가 경제나 의식주를 하다보면 정의나 미(美), 올바름 등을 잊고 그때그때 살아가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악마가 되고 악이 되는 상황을 겪고 있다.

 

그러니까 옛날 희랍사람들은 경제적, 과학적으로 현대 우리보다 훨씬 못했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은 먹고 자고 그런 것을 위해서 살지는 않았다. 많은 악이 있었지만 그래도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Life(진선미)이다.

 

  오늘 이 생生이 우리나라 말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지냈는지를 보겠다.

 

우리나라는 산업화, 민주화 세대 간 갈등, 다음 미래는 ‘생명화’가 화두가 되어야

 

유네스코 제2차 예술문화교육대회 위원장이 되었을 때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아직 인간이 뭔지 세상이 뭔지 모르는 아이들의 눈물은 어른들의 책임이고, 우리 미래의 비극이 숨어 있기 때문에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아이들 눈물은 참기 힘들다.

 

아이들의 눈물처럼 우리나라가 산업화 과정,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이 두 시대의 눈물이라고 하는 것은 고통의 눈물이거나 한의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 과거에 산업화, 민주화의 원동력이 있었던 것인데 이제 이 눈물만 가지고는 안 된다.

 

민주화의 피, 산업화의 땀, 다음에 오는 미래는 무엇인가? ‘생명화’다. 생명화의 눈물은 내가 고통스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남의 슬픔, 남의 고통을 함께 울어주는 ‘공감의 눈물’이다. 생명은 공감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난과 억압의 시대에 태어났던 이들의 격렬한 눈물이 우리가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고속시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사는 새로운 시대가 와야 된다.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는데 그 다음으로 건너가는 것이 잘 안 되는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두개의 수레바퀴여야 하는데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항상 서로 싸움을 하고 있다. 서로 산업화를 이룩한 주도자하고 민주화를 이룩한 주도자들은 항상 자기가 유일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 둘을 복합시키고 넘어설 수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부족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갈등과 싸움으로는 절대 미래로 갈수 없다. 그러니까 21세기는 산업화, 민주화에서 ‘생명화’라고 하는 새로운 화두를 본인이 제시했고, 최근에 쓴 『생명자본주의』도 바로 이러한 뜻에서 쓴 것이다.

 

20세기는 기계와 불의 시대, 21세기는 생명과 물의 시대

 

‘생명’이 낡은 말처럼 들리지만, 그동안 산업화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게 바로 이 생명이라고 하는 화두다. 20세기는 ‘기계와 불의 시대’라고도 한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고 기계를 움직이는 불 에너지의 시대라는 것. 지금도 변함없지만 21세기 패러다임으로 기계를 넘어서 생명으로 가야 되고 불을 넘어서 물의 시대로 간다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많은 생명자본주의나 자연자본주의 사람들이 불과 물이 인간의 문명을 상징하고 문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프로메테우스로 상징되는 불은 맞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 저항해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전해준 것이다. 그렇게 불의에 투쟁하고 혁명하고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물은 낮은 자리를 찾아 가고 끝없이 땅으로 스며들어 생명을 발육한다. 때문에 도교道敎의 관점에서 노자老子는 물을 ‘가장 최고 인간의 상선上善’, 즉 제일 선한 모습이라고 했다. 서양은 대게 프로메테우스 전설이 있어 불에서 문화의 기원을 봤다.

 

우리는 분별을 모르는 걸 ‘물불 모르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이 물과 불의 문화원형은 같은 자연이면서도 인간만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다. 치산치수治山治水한다. 때문에 한국의 말, 물, 불 이 세 가지 키워드만 알아도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말은 엠피(mp)대응이 명확한 놀라운 언어이다

 

이 물과 불을 살펴보면 우리말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찾을 수 있다. 탈레스(Thales)도 말했듯 물과 불, 수성설과 화성설이 자연과학이나 인간의 의식을 아는 2대 원소인데 이를 서로 가리키는 각국의 말은 제각각이다. 일본의 히(ひ,불), 미즈(みず,물)는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 히는 단음절이고 미즈는 2음절이다. 그리고 영어의 워터(water)와 파이어(fire) 둘 다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만은 묘하게 물, 불이라 해서 엠피(m,p)대응을 가지고 완전히 짝을 이룬다. 글자로 쓰면 물에다가 뿔만 붙이면 불이 된다. 가장 기본적인 물질을 표현하는 말이 한국어처럼 대응관계를 가지는 것을 지금까지 아직 찾지 못했다.

 

인간은 어느 나라든지 ㅁ(미음) 순음계통(m n o,  리퀴드 음)과 파열음(p t k, ㅍ,ㅌ,ㅋ)이 반드시 대응관계를 가진다. 이를 엠피 대응이라한다. 어머니, 아버지를 예로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태어나 최초로 배우는 아빠, 엄마는 파더(father),  더(mother)라고 전부 ㅍ 파열음과 ㅁ 리퀴드음의 대응이다. 일본말은 가짱, 도짱이라 해서 다르지만, 전 세계 언어에서 엄마, 아빠는 이와 같다. 어머니, 엄마, 아버지, 아빠, 모두 엠피대응이다.

 

물은 m이고 엄마 계통이다. 불은 p이고 아버지 계통이다. 예를 들어 눈망울, 말랑 말랑한 것은 망울이라고 하고, 딱딱한 것은 방울이라고 한다. 미음을 비읍으로 바꾸면 그렇다. 망울 방울, 마당 바탕, 이것이 같은 것이다. 엠피 대응이 이렇게 우리나라처럼 잘되는 말은 없다.

 

다른 예로 물은 맑고 불은 밝다고 표현한다. 영어로는 물(Water)은 클리어(clear)하고 불(Fire)는 브라이트(bright)라고 하여 대응이 되지 않는다. 물은 맑고 불은 밝다고 하여 ㄹ,ㄱ, ㄹ,ㄱ, ㅁ, ㅂ의 조화가 할수록 신비한 것이다.

 

신체를 가리키는 말도 영어에서 머리카락(hair), 손가락(Finger), 다리(Leg) 서로 관련이 없다. 그러나 우리말은 머리에서 갈라져서 머리카락, 손에서 갈라져서 손가락, 발에서 갈라져서 발가락이라 한다. 마치 전문가들이 모여 심의해서 만든 것 같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다. 누가 만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말은 모두 관계어이고 모음조화의 놀라운 미래자원이다

 

언어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어떤 언어의 구조를 살펴보면 단독어로 만들어졌는지 관계어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한국말은 전부 관계어인데다 모음조화가 놀라운 말들이 있다. 한국말이 우리 자원이고 미래의 많은 사고思考의 자원이 되는 것인데 이것을 그냥 영어, 불어, 한자어 배우다가 전부 잊어버린 것이다.

 

세상 어딜 봐도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없다. 나는 이 속담을 보고  젊었을 때 “이러니까 우리가 가난하게 살았지. 어떻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느냐. 가슴을 째도 천 냥 빚을 못 갚는데(<베니스의 상인>인용)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면 경제가 되겠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까 세상에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믿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매우 놀랍다. 문화의 힘이 지배하는 21세기에서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 그게 옛날과 다른 것이다.

 

중국고사를 들어보면 왕이 어린 태자 셋의 장래를 점쳐 보라고 점쟁이를 불렀다. 점을 쳐보니 전부 젊어서 죽을 팔자라 이 왕조가 망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니 순진한 점쟁이가  “폐하 큰일 났습니다. 폐하보다 왕자들이 먼저 죽겠습니다.”했다. 왕이 노발대발하면서 처형시켜버렸다. 두 번째 점쟁이는 같은 점괘에  “경하 드립니다. 폐하 왕자들보다 전하께서 더 오래 사시겠습니다.”라고해서 살았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느냐 긍정적으로 이야기 했느냐에 따라 세상은 이렇게 바뀐다.

 

한국말은 긍정어가 중심이고 미래의 희망이 담겨있다

 

우리는 지금 부정적인 말을 많이 쓰고 있다. 한국말은 본래 긍정적인 말이 앞섰는데 어느새 부정적으로 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외국에는 “잘한다. 못한다.” 이것밖에 없다. 근데 우리나라는 잘한다와 못 한다를 붙여가지고 ‘잘못하다’라고 표현했다. 잘하고 못한 것의 중간이니까 “못하긴 못했지만 잘 한 것도 있어”라는 것이 ‘잘못하다’라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말은 긍정어를 중심으로 만든 말이다. 극한적으로 쓰는 말이 없고 ‘중간 언어’들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모진 말을 써도 따지고 보면 욕이 아니다. 가령 예를 들어 미친 사람, 거지 이런 말은 사실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못된 놈’ 이렇게 말한다. ‘되다’는 내일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말이니 욕이 아니다. 내일 잘되면 되지 않겠나. 도둑은 내일도 도둑이지만 못된 놈은 내일 잘된 놈이 될 수 있다.

 

‘되다’는 것은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밤이 낮이 되는 것처럼 ‘끝없는 미래’를 향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말끝마다 ‘됐다, 못됐다, 못된 놈, 잘된 놈, 안 됐네’ 등 ‘되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걸 becoming이라고 할 것이고, 서양은 ‘being is’가 중심이다. 그러니까 서양은 being 모드고 우리는 become 모드다. 하나는 존재론이고 하나는 생성론이다. 서양은 전부 존재론이라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분할 수 없을 때까지 원자, 전자, 양자 끝없이 나누는 것이다.  더 이상 분리 못하는 것이 개인이다. 개성, 개인이라는 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끝없이 ‘되는 것’, become인 것이다. 시인 서정주는 “내가/돌이 되면//돌은/연꽃이 되고//연꽃은/호수가 되고//내가/호수가 되면//호수는/연꽃이 되고//연꽃은/돌이 되고 ”라고 했다. 그것은 끝없이 순환하니까 짧은 시인데 끝이 없다.

 

말의 구조가 우리는 becoming으로 되어 있고 서양은 being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고생을 하더라도 becoming으로 가니까 미래의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대학 재학 당시 부정적인 글을 많이 썼다. “한국말로 어제, 오늘은 있는데 내일來日은 한자말밖에 없다. 오죽 내일이 없으면 내일이라는 말도 잊고 한자를 썼겠나. 우리는 내일이 없는 민족”이라고 했다. 그런데 살펴보니 순수 우리말에 내일이 없어도 글피, 그글피까지 있다. 세상 어디에도 그글피까지 있는 나라가 없다.

 

한국말을 가까이 보면서 “내가 왜 이런 민족에 태어났나?” 땅을 쳤는데 조금 더 돌이켜보고 멀리 보면 이 속에 희망이 있고 이 고통 속에 남들이 모르는 내일이 있다. 우리는 항상 부정적인 시점에서만 문화를 봐왔는데 긍정적으로 보면 거기에 보석이 있고 내일이 있다. 한국말을 뒤져보면 알게 된다.

 

우리말은 교착어, ‘조사(토씨)’하나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언어는 굴절어하고 교착어가 있는데 굴절어는 위치에 의해서 말이 결정되고 교착어는 조사에 의해서 의미가 설정된다. 우리는 교착어라 앞뒤가 뒤바뀌어도 조사만 붙여보면 말이 된다. 영어는 절대로 주어, 동사, 목적어의 자리를 바꿔 놓으면 말이 안 된다.

 

우리나라에는 조사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조사, 즉 토씨 하나로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나나와 도도’ 라는 예를 들겠다. 어떤 사람에게 “직장생활 어떠냐?” 라고 물으니  대부분이 “아유, 저 실망했어요. 죽어라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차나 나르라고 해요.”라고 했다. 왜 ‘나’자를 붙이냐는 것인가? 차도 날랐다고 그러면 인생이 달라진다. 직장에서 다른 일도 하고 차도 날랐지 차나 날랐나?

이 세상은 ‘나나’하고 지내는 사람하고 ‘도도’ 하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말이고 똑같은 행위인데 토씨 하나만 바꾸면 소극적, 부정적이 되기도 하고 적극적, 긍정적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전 국민이 토씨 하나만 바꿔줘도 한국은 살 수 있다. 서로 대화할 때도 조사하나만 달라져도 관계가 달라진다. 조사하나만 바꿔도 인생이 달라진다.

 

한국말은 굉장히 섬세하다. 영어나 불어로 ‘보슬비와 부슬비’를 표현할 수 있겠나. 모음 ㅗ와 ㅜ만 바꿨는데 보슬비는 우산을 안 받쳐도 되나 부슬비는 비옷을 입어야 한다. 모음 ‘ㅏ’ 하나를 돌려보면 ‘ㅏ ㅗ ㅜ  ㅓ’ 4개의 모음이 만들어 진다. 그런데 이것을 가르치지 않고 한글학자들은 “결합문자가 어떻다. 세종대왕이 어떻다”고 어렵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멘트(moment)라고 해서 전 세계에 나가도 이런 문자가 없다. 예를 들어 길거리에 ‘곰’자가 하나 떨어져 있는데 그것을 다른 쪽에서 보면 ‘문’이 된다. 내가 봤을 때 ‘곰’자도 되고 ‘문’자도 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한글이 있는 게 아니다. ‘ㅗ’자가 한 바퀴 돌면 춘하추동春夏秋冬을 뜻한다. ‘ㅗ ㅏ’는 밝은 것, 양성모음이고, ‘ㅜ ㅓ’는 어두운 것, 음성모음이다.

 

  

 

 

‘ㅗ’는 동쪽, 푸른 색깔, 봄을 뜻한다. 봄의 양기가 점점 높아지니까 ‘ㅏ’하고 커진다. 이것이 음으로 들어가면 ‘ㅜ’가 되서 ‘ㅗ’가 ‘ㅜ’와 대응되고 ‘ㅏ’가 ‘ㅓ’와 대응 되어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이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ㅗ ㅜ’가 대응이 되어 보슬비는 봄비, 양성이고, 부슬비는 음성이고 굵다. ‘ㅏ ㅓ’대응으로 “너 가짓말 하지 마. 너 거짓말 하지 마.”라고 했을 때 가짓말은 음흉한 게 아니라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는 뜻이고 거짓말은 진짜 음흉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색채어를 예를 들면 뽀얗다, 뿌옇다, 깜깜하다, 껌껌하다가 있다. 모든 것들이 오와 우가 대응되고 아가 어와 대응 된다. 이런 말이나 글은 전 세계에 없다.

 

우리말 기본모음 속에 음양오행이 모두 담겨있다

음양오행은 중국 아닌 동이족, 우리민족의 기본철학일 것

 

그러니까 똑같은 글자를 동서남북으로 돌려서 만들고 동은 서와, 남은 북과 대응을 한다. 음양오행이 적용된다. ‘ㅗ’가 목木, ‘ㅏ’가 화火, ‘ㅜ’가 금金, ‘ㅓ’가 수 水가 된다. 가운데 중간은 토土이다. 서울도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동서남북 중앙에 각각 상징물이 있다. 동쪽은 봄을 상징하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중 인仁을 뜻하니 동대문으로 흥인지문之門을 세우고, 서쪽에 돈의문門,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북문인 홍지문을 세웠다. 그리고 중앙에 신에 해당하는 보신각을 세웠다. 우리 언어와 음양오행을 살펴보자.  ‘ㅗ ㅏ ㅜ ㅓ’ 기본음에 음양오행이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음양오행은 중국의 사상이 아니라 음양오행을 생활 깊숙이 말, 사고방식 모든 데 들어간 동이족들, 우리민족의 기본철학일 것이다. 중국말에는 보슬비, 부슬비처럼 ‘ㅗ ㅜ’ 음양대응이 되는 말이 없다. 음양대응이 모음조화를 갖는 말은 우리말과 터키어 등 몇 나라 되지 않고 터키어도 그렇게 강하지 않다. 우리말은 모음조화가 과학적으로 되어 있다. 

 

그런 나라에 한자가 들어와서 몇 천 년을 갔다. 엄청난 폭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한자가 우리말을 죽였냐고 봤을 때 그렇지 못했다. 정조대왕의 어필로 편지 쓴 것을 보면, ‘뒤죽박죽’이란 글이 있다. 한자말을 쓰다가 ‘뒤죽박죽’은 절대 한자로 표현하지 못하니 우리말로 써 놓은 것이다. 보슬비와 부슬비, 줄줄  졸졸 조록조록처럼 한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섬세한 말들이 많다.

 

토박이말로 생각하고 창조하자

 

우리는 우리 언어를 잘 모른다. 기업이 전 세계로 나가라면 전 세계 말로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 ‘네이밍(naming)’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중요성을 모른다. 도요타는 ‘도do''''''''가 아니라 ‘토(to)요타''''''''라고 세계로 나갔다. t는 파열음으로 강하며 파워가 있다. 이렇게 세계 전략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말을 활용하는 창조력이 없다. 중부고속도로 가면 제1터널, 제2터널, 제3터널로 되어있다. 이 터널지역이 바로 이천 도요지다. 제1터널은 청자터널, 제2터널은 백자 터널, 제3터널은 분청터널로 하면 어떤가. 청자, 분청 해놓으면 차가 지나가면 아이들이라도 “아~ 분청이다, 청자다, 백자다” 하지 않겠는가.  이를 제안하니 공문서 다 고쳐야 되고 예산이 많이 들어 안 된다고 한다. 1터널, 2터널 그대로 놔두고, 1터널 청자터널, 2터널 백자터널로 수정을 못할까? 창조력이 없는 것이고 행정 관료들은 절대로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상상력이 없다. 고지식한 공무원과 튀는 예술인들을 잘 결합해야 창조력이 생길 것이다.

 

토박이말로 생각하자. ‘버큘러 랭귀지’(Vernacular language)는 학습된 언어가 아니라 토착적인 전통문화가 생활 속에어있는 것을 말한다. 이반 일리치라는 유명한 사회학자는 “모든 걸 이 버큘러로 하자.”고 했다. 버나큘라 랭귀지는 학습 언어가 아니라 세살 때부터 배운 어머니의 말을 버큘러라고 한다. 우리는 토박이말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아이들은 옹알이도 모국어로 한다. 말을 배우기도 전에 옹알이를 들어보면 아이가 프랑스 아이인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아이인지 알 수 있다. 프랑스 말로는 아기들이 ‘바바바바바바’ 한다. 그런데 나이지리아 애들은 ‘아바아바아바’ 라고 한다. 즉 타고날 때부터 프랑스 아기는 프랑스 언어를 할 수 있는 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말은 학습하는 것이지 유전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최근에는 말도 유전된다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응원하는데 전 세계 사람들은 박자를 치거나 나팔을 불 때 박자를 정확하게 분절한다. 그런데 우리만 ‘짝짜작 짝짝’하고 엇박자를 친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그 당시 교육을 배워서 이 엇박자를  잘 하지 못한다. 엇박자는 우리 민족의 가락이다. 규칙적인 것이 아니고 박자가 약간 어긋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민국 ~한민국 짝짜작 짝짝’ 하는데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옹알이를 하듯이 우리말의 기본 톤이라는 것이다. 서양인은 액센트가 우리처럼 첫 번째에 붙지 않고 2음절에 붙는다. 그래서 한국말을 알아도 같은 톤으로 하기 어렵다.

 

모든 문화의 기본에는 자기나라의 톤이 있다. 2002년 월드컵하면서 우리 가락을 겨우 찾았다. 그동안 우리가 그 가락과 토박이말을 잃었다. 그거 하나만 찾아도 우리는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다. 우리 것만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다. 중국은 중국만의 장점이 있고 일본은 일본만의 장점이 있다. 이것들이 어울려서 글로벌이 되고 다양성이 된다.

 

우리말 속에 숨어있는 신비하고 초월적 철학을 캐내는 것이 미래의  문화자원

 

우리는 생활 하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생활이라는 도구와 그 방편이 되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불렀다. ‘살림’은 죽은 것을 살리는 타동사이고 ‘살이’는 그것과 함께 산다는 자동사이다. 살림살이는 타동사, 자동사의 결합으로 살려고 남을 살리는 것이다. 남을 살려놓고 함께 사는 공동체 문화이다. 오늘날 경제는 다 죽이는 경제다. 남을 죽여야 내가 사는 경쟁이다. 살리는 경제를 하자는 것이 우리의 전통 문화이고 그것이 앞으로 창조가 되는 것이다.

 

살림살이라는 말속에 ‘생명’이라는 말이 두개나 겹쳐있다. 이 ‘살다’처럼 아름다운 말이 없다. 이 시옷자 붙은 말이 다 그렇다. 사랑, 살자. 자살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 이것이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마술이고 논리적이 아니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신비한 초월적 철학이 우리 몸속에 세 살 때부터 어있다. 그걸 캐내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중동에서 석유 캐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미인으로 꼽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은 얼굴이 아니고 말이었다. 실제로는 그리 예쁜 얼굴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 라틴어, 아랍어 등 7개 국어를 자유자로 구사하고 화술도 잘했으며, 새소리 같이 감미로운 음성으로 사람을 사로잡았다. 매력이 아니라 지력, 언어의 힘으로 두 장군을 완전히 정복한 것이 클레오파트라다. 문화의 힘이다.

 

지금 여성의 소프트 파워가 강하다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옛날에는 구매력의 80%가 남자에게 있었는데 지금은 통계를 내보면 미국 자동차시장 구매력의 80%가 여자들이 가지고 있다. 부드러운 것이 이기는 것이다. 21세기는 물의 시대지 불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말이 그렇다.

 

공생하는 생명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여론輿論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輿자에 왜 가마, 수레라는 글자를 쓰는가. 여론은 ‘가마를 멘 사람의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여론은 항상 지배받고 소외된 민중들이 말하는 게 여론이고 아시아적인 의미에서의 여론이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 여론이라는 것이 나쁜 쪽으로 가기 마련이다. 파워 있는 사람들이나 국가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오피니언의의견이 여론이 안 되고 대중이 말하는 것만 여론 노릇을 하느냐는 것이다.

 

서양의 ‘오피니언 리더’라는 건 전부 엘리트나 대중들이 합쳐서 여론이 되는데 왜 우리는 가마 탄 사람들 말은 전혀 안되고 가마 멘 사람들만 되느냐는 것이다. 거꾸로 가마 탄 사람만이 지배를 하고 가마를 멘 사람들은 소외되느냐는 것이고  둘 다 불행한 것이다. 가마 탄 사람은  가마 멘 사람을 생각하고 멘 사람은 가마 탄 사람을 생각해서 “나도 언젠가는 가마 메는 사람이 아니라 타는 사람이 되자. 나는 언젠가는 저 가마를 멘 사람의 고통을 알자.” 이것이 민주주의이다.

 

어느 세상이든지 메는 사람과 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이 시스템은 없앨 수 없다. 하지만 멘 사람과 탄 사람이 한 몸이라고 생각하면 타는 사람은 메고 다니는 사람에게 미안하고, 멘 사람은 “저 훌륭한 사람을 태워서 오늘도 일을 한다.”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둘 다 공존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 여론은 부정적인 여론이지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여론이 끌고 가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여론에서 판정하면 되겠는가?

 

린 매글리스라고 하는 생물학자가 한 유명한 말이다. 그녀는 미토콘드리아를 연구하여 “인간의 세포는 공생한다. 포식하고 기생하고 공생한다.”고 공생이론을 내놓았다. 인간은 기식하거나 포식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공생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다윈은 포식하는 것만 연구하였고 이것이 진화론이다.

 

린 매글리스는 17번이나 학술지에서 떨어졌는데 DNA조사를 해보니까 이 사람의 이론이 맞았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라는 건 외로운 것이고 1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가야 할 때가 있고, 1천 사람이 가는데 앉아있을 때가 있는 것이 창조의 세계고 리더의 길이며 이것이 나라를 끌고 가는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현상은 사라지는데 미래는 없다.

민주주의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는 대중, 600명의 배심원들이 죽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제자인 플라톤이 “민주주의, 포퓨리스(Populace)를 하면 안 되겠다. 현인賢人이 되어야겠다.”고 현인정치를 부르짖었다. 민주주의를 하는 것만이 대세가 아니라 창조적인 민주주의, 생명 민주주의를 해야 되겠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스탈린이 몇 명 죽였는가. 전부 천만이 넘게 죽였다. 폴 포정권은 국민의 3분지 1을 죽였다. 그렇기 때문에 편 가르고 분열하는 나라가 잘되는 일은 절대 없다. 창조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뜻이다.

 

용을 말로만 들은 어린아이가 홍수에 떠내려가는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 몰라서 “용이다!” 라고 했다. 그러자 떠내려가던 뱀이 진짜 용이 되어 승천을 하더란다. 이게 말의 힘이다. 뱀 보고서도 용이라고 하면 용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용에게 뱀이라고 그러면 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용보고 전부 뱀이라 하고 뱀보고 용이라고 해서 같이 상승하느냐 같이 떨어지느냐는 앞으로 우리 미래에 달려있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어느 하나를 버리지 않고 끌어안아

접목하는 창조력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슬기로운가 하면 한자말이 와도 절대로 한국말을 못 버린다. 황토하면 그 자체로 한자말인데 흙을 붙여서 ‘황토흙’이라고 한다. 그러고 동해라고 하면 바다라는 자가 이미 있는데 ‘동해바다’라고 한다. 역전앞, 처갓집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에서는 다 틀린 거라고 하는데 이게 맞는 말이다. 한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본말도 모찌가 떡인데 ‘모찌떡’이라고 한다. 서양의 깡은 벌써 통인데 ‘깡통’이라고 한다. 틀린 말이 아니라 우리말하고 외래어가 들어왔을 때 둘 중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모순되는 것을 끌어안으면서도 우리 것을 지켰다는 것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을 전 세계 18억 인구가 다운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작은 사천왕상의 동작과 똑같다. 우리 말, 우리 유전자 속에 팝송, 랩이 들어와도 동해가 아니라 동해바다라고 하듯이 접목이 된다. 이것이 창조이다.

 

우리문화는 넉넉한 여분과 여유가 있고 사람이 중심이다

 

리는 박을 지붕위에다 올린다. 일본이나 외국에는 없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농장이라 하면 넓은 개념이다. 2배 생산을 하려면 2배의 땅이 필요하니 끝없이 땅을 빼앗기 위한 전쟁을 했다. 우리는 지붕 위에 하늘농장을 지어 박을 키우고 방 안에서 콩나물을 키워먹는 슬기를 발휘했다.   

 

한국 전통바지는 허리통이 세계에서 제일 넓게 만들어져서 모두 접어 입는다. 우스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 배는 밥 먹으면 나오고 배고프면 들어간다. 우리 조상들은 치수를 맞춘 것이 아니라 배에다 옷을 맞춘 것이다. 배가 부르면 풀어 입고 배가 들어가면 좁혀 입었다. 외국사람들이 입는 바지는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 한 번도 제대로 맞는 법이 없이 작거나 헐렁거리는 것이다. 옷이 사람을 감싸줘야지 어떻게 옷 치수 속에 사람이 들어가겠는가? 서양의 가방이 넣는 문화고, 우리의 보자기가 싸는 문화인 것과 같다. 사람이 중심이다.

 

신발을 보자. 한국 전통 신발인 짚신은 좌우가 없다. 고무신은 좌우가 똑같고 웬만한 사람이 신어도 다 맞는다. 그런데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나 가죽구두 같은 것을 보면 한 치가 틀려도 안 들어간다. 즉 서양은 치수를 정밀하게 따지니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넉넉해서 웬만큼 틀려도 포용을 할 수 있다.

 

오늘날 GNP도 늘고 잘 살게 되었다는데 급박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것은 좌우 한치 두치 따지기 때문이다. 짚신과 고무신을 만든 문화를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한다. 특히 봄에 삼는 짚신은 오합혜五合鞋라 해서 반쯤만 잡아당겨 헐렁하게 삼아 밟아도 벌레가 죽지 않게 했다. 그런 한국인들이 지금은 어떻게 공해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가?

 

한국 사람은 ‘먹어버려’ ‘잊어버려’처럼 버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둬’라고 하여 두는 것이다. 서양은 옷감 조각들을 다 버리지만 우리는 이를 모아서 세상에서 가장 현란하고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드는 민족이다. 밥 탄 것도 우리는 누룽지로 먹고, 김장 때 버려지는 채소 잎도 시래기로 만들었다.

 

넉넉한 여분, 여운의 미가 있다. 옷고름도 여분이고 에밀레종도 서양종처럼 금세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긴 여운이 있다. 우리는 소금, 쌀 등을 팔 때 흘러내려도 계속 올려준다. 더 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여 차마 못 깎는 것이다. 이것이 고봉문화고 너와 내가 사람답게 사는 길이다.

 

지금 현대화된 닭장에서는 달걀들을 콘베어벨트로 움직여 공장일 뿐 생명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달걀꾸러미는 참으로 아름답다. 반을 싸고 반을 보여준다. 한쪽은 안전을 위한 하드웨어고, 한쪽은 달걀이 큰지 작은지 보여주기 위한 정보로 소프트웨어이다. 세계포장대회에서 최고 금상을 탄 것이 한국의 달걀꾸러미이다.  

 

한국인이 그리는 삶의 공간을 통해 본 자연사상과 음양조화의 철학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노래를 들어보면 한국의 전통문화, 삶의 터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노래 가사는 슬픈 부분이 없는데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아주 멀고 먼 조상 때부터 우리 마음속에서 살고 싶은 곳이 어디였느냐? 아주 짧은 시인데 이처럼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시가 없다. 삶의 거점을 말하는데 그리운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말을 뒤집어 보면 아빠, 형님이 강변이 아니고 자연 아닌 공장에서, 전쟁터에서, 서울 도시에서, 아스팔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엄마야 누나야 에서 ‘야’자가 들어가는데 영어에는 이런 호격이 없다. 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없을 때 부른다는 것이고 부재 공간을 의미한다.

 

엄마, 누나는 아버지 형님이 갖고 있지 않는 생명의 상징인 자궁을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하는 대상이다. 즉 ‘엄마야 누나야’를 부르는 것은 생명을 부르는 것이고, 비생명과 생명이 대립되는 곳이다. ‘강변 살자’는 것은 엄마, 누나의 생명 공간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작은 공간 속에 여성 공간, 부재 공간, 자연 공간, 삶의 공간, 네 개의 공간이 숨어 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뜰은 앞에 있는 열린 공간이며 전방공간이고, 뒷문은 후방공간이다. ‘반짝이는 금모래 빛’에서는 햇볕이라는 자연과 금이라는 물질이 들어있다. 모래는 노란 황금빛이다. 뒷문 밖 갈잎은 식물이며, 바람이 불어 갈잎들이 설렁거리는 노래 소리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이다. 짧은 시 속에 우리들의 원형인 전방과 후방, 물질 공간, 유기물, 무기물, 시각 공간, 빛의 공간, 청각 공간 등 무수한 우리들의 고향이 들어있다. 이걸 불러보면 ‘엄마야’ 하고 부르듯이 잃어버린 것을 향해서 외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뒤에 산이 있고 앞에 강이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속에서 몇 천 년을 살아왔다. 이 배산임수는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 수평공간과 수직공간이 조화를 이룬 속에서 인간이 사는 것이다. 수직공간이자 멈춰있는 산과 수평공간이자 흘러가는 강 사이에서 사는 것이 한국인의 자연사상이고 음양 조화이다. <엄마야 누나야>에는 우리 기본이 들어있다.

 

한국말 속에  미래 인재가 캐야할 21세기 창조의 잠재력이 들어있다

 

우리말을 많이 상실해서 외국에 가면 김치처럼 우리 건데도 일본말 중국어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는 것이 많다. 동해도 외국에 나가면 Sea of Japan이 되어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영어로 번역해보면 한국국가에 Sea of Japan 나오는 이런 아주 참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살면서도 누구하나 가슴 치는 사람이 없다.

 

한국말 속에 창조의 기본이 들어 있다. 끝없이 서로 대립되는 것을 섞어서 융합하고 음양오행처럼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만물이 하나로 합쳐지는 태극 문양처럼 서로 연계되어 있는 관계의 사상이 있다. 이것이 창조적인 21세기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우리 민족의 근원이며 잠재력이라 믿는다. 지금까지 불행한 역사로 살았지만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휘해야 한다. 시추하지 못한 지하자원, 금광으로서 우리 문화가 언어 속에 들어있다.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캐도록 하여 창조하게 만들자. 희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