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차 포럼]2015년 대한민국, 다산에게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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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대한민국, 다산에게 배우다

 

朴 錫 武 (다산연구소 이사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내 용 목 차

              1. 다산의 생애
              2. 강진 유배생활과 학문적 업적
              3. 다산의 가르침과 사상
              4. 목민심서를 통한 다산의 가르침
              5. 결론

 

 

I. 다산의 생애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 후반 경기도 광주군 초부방 마현리(지금 :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서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한 정재원(丁載遠)의 5남 3녀 가운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 1730~1792)으로 압해 정씨이고, 어머니는 해남 윤씨(海南尹氏, 1728~1770)이다.
어머니 해남윤씨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인데 학자이자 3재화가로 유명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였으니, 공재는 바로 다산의 외증조부가 된다. 친가인 나주정씨는 기호남인계의 명문집안으로 다산의 선조들에는 연달아 8대에 걸쳐 홍문관 벼슬을 역임하여 ‘8대 옥당집안’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듣던 가문이었고, 해남 윤씨인 다산의 외가는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계 집안으로 학문과 벼슬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넉넉한 살림으로 호남부호라는 이름을 듣던 명가였다.

 

 


정약용의 형제들로는, 가장 큰 장형은 이복(異腹)으로 의령 남씨 소생의 정약현(丁若鉉)이고 그의 첫 부인이 처음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벽’의 누이였다. 그의 딸은 황사영과 혼인했다. 어머니 해남 윤씨 소생으로는 둘째형 정약전(丁若銓)과 셋째형 정약종(丁若鍾)이 있다. 그리고 누이가 이승훈(李承薰)과 혼인했다. 서모 김씨 소생으로 정약횡(丁若鐄)이 있다. 이승훈은 최초로 세례를 받았고, 정약종은 신유년에 순교했다. 다산은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실학을 계승했으며 북학파의 사상까지 받아들여 실용지학(實用之學)·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다산은 일생 500여권이 넘는 저술과 2,700여수의 시를 남기고, 1836년(헌종2) 75세의 삶을 일기로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다산 생애(개관)

다산의 생애는 대체로 네 단계의 시기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시기는 수학기(修學期)로, 유년시절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기 전까지인 28세 때까지로 구분되는데, 경사(經史)를 두루 익히고 과거공부에 온 힘을 기울여 기본적인 유학공부를 섭렵한 시기를 말한다. 둘째 시기는 28세부터 벼슬을 그만 둔 38세까지의 사환기(仕宦期)이다. 영특한 군주 정조대왕의 재임기간에 해당하는 시기로, 한림학사 ? 홍문관교리 ? 암행어사 ? 곡산도호부사 ? 동부승지 ?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내며 정조의 치세를 도와 이른바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를 이룩한 시점을 말한다. 한강에 배다리를 가설하고 수원의 화성을 축조하는 등 재기발랄한 문신이자 기술 관료로서의 온갖 능력을 발휘한 때였다. 세 번째 시기는 40세부터 57세까지의 18년간 강진 유배기간으로 방대한 양의 책을 집필한 저술기(著述期)이다. 500여 권이 넘는 학술 업적의 대부분이 그 기간에 달성되었으니 다산 생애의 가장 핵심적인 시기였다. 네 번째 시기는 57세에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과 삶을 마무리하고 75세를 일기로 고향집에서 운명했던 정리기(整理期)이다. 다산은 이 시기에 참고자료나 서책의 부족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저서들을 보완하고 수정하였다.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객관적으로 비판 받고 다시 점검하는 그런 시기였다. 당론이 다른 소론계의 석천 신작(申綽)이나 노론계의 대산 김매순(金邁淳). 연천 홍석주(洪奭周)와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서신교환을 통해 자신의 학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회고하면서 61세의 환갑 해에는 ‘자찬묘지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애를 자서전으로 정리한 글을 짓기도 했다.


다산은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7세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멀고 가까움이 달라서라네” [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라는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았다. 9세에 어머니 해남 윤씨가 별세하고, 10세에 부친에게서 경서와 역사서를 배우기 시작했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홍씨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홍화보(洪和輔)의 따님이었는데, 당대 남인계의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당시 남인계 소장학자들인 이가환(李家煥, 이익의 종손), 이벽(李蘗), 이승훈(李承薰)등과 교유하면서 실학의 증시조라 할 수 있는 이익(李瀷)의 유고를 읽게 되었는데, 깊은 감명을 받고 사숙하기로 했다. 이후 다산은 20세를 전후 해 과거공부에 본격적으로 힘을 기울였으며 급기야 22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정조대왕을 만나게 되고 총애를 받게 된다. 이러한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고도 한다. 23세 때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면서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는다. 28세에 대과(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아갔다. 


28세때 벼슬에 나아간 다산은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는 등 정조의 총애 속에서 재주와 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30세 때 진산사건(晉山事件, 1791)이 발생한 후로 정적들에게 시달리게 되었다. 배다리 설계에서 재주를 보인 다산은 31세에 부친상으로 여막살이를 하는 동안 정조로부터 수원화성(水原華城) 설계를 명령받는다. 33세에 경기북부 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참혹상을 목격하고, 권세를 휘둘러 민폐를 끼친 관리들을 처벌하도록 정조에게 보고했다.
1795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온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압박이 심해졌다. 이를 빌미로 채제공(蔡濟恭) 등 남인세력에 대한 정치적 공세도 가열되었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으로 좌천하여 임명하고, 이승훈은 예산현(禮山縣)으로 유배 보냈다. 천주교 혐의를 씻어주고자 정치적 공세를 벗어나게 한 것이었다.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용했다. 이에 대해 다산은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려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솔직히 밝혔다. 이 상소는 다산이 한때 천주교에 경도되었지만 나중에 버렸다고하는 변명이자 고백이었다. 사직상소를 낸 다음 달 정조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부사(谷山府使)로 특별히 임명했다. 그때 세력을 잡은 자로 참소하고 시샘하는 자가 많아 다산을 몇 년 외직(지방직)에 근무하도록 하여 그 불길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곡산 부임길에 데모 주동자 이계심(李啓心)을 만났다. 다산은 관청의 행정에 항의하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관청이 밝은 행정을 하는 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위적 지배를 부정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려는 목민관의 자세를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다산은 곡산부사로 있은 2년간 직접 한 고을의 피폐한 민생을 구제하고 누적된 폐단을 바로잡는 행정을 펼 수 있었다. 38세(1799)때 정조는 다산을 다시 조정에 불러 형조 참의에 제수했다.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의심스러운 사건들을 명쾌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의 정치적 공격도 고조되었다. 다산은 39세(1800) 봄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마현(馬峴)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참소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하면 공격받지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다산에게 이제는 아무런 보호막이 없었다. 낙향해 있던 다산은 노자의 『도덕경』중 “머뭇머뭇, 겨울시내를 건너듯[與兮 若冬涉川] 조심조심, 사방을 두려워하듯[猶兮 若畏四隣]”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짓고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그러나 정적들의 칼날은 피할 수 없었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한 ‘신유옥사’(辛酉獄事, 1801)이 일어난 것이다.
 


신유옥사는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이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조정의 주도권을 노론 벽파가 장악한 가운데 발생했다. 천주교 배척을 명분으로 정적을 제거하기에 나선 것이다. 신유옥사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순교하고, 한때 천주교를 받아들였다가 이제는 거리를 둔 둘째 형 정약전과 다산은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산의 첫 유배지는 경상북도 장기(長?)였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서울로 다시 압송된 다산은 그해 11월 하순에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형제는 나주 율정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 서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형은 흑산도와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년 후에 죽고,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8년 후에 귀향했다. 다산은 유배기간동안 좌절하지 않고 역경을 기회로 바꾸었다. 내가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고 하면서 학문과 저술활동에 열중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네 곳을 옮겨 다니며 거처했다. (1) 사의재 : 1801년 겨울부터 약4년 (2) 고성사 보은산방 :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3) 제자 이청(학래)의 집 : 1806년 가을부터 약 1년 반 (4) 다산초당(윤단의 산정): 1808년 봄부터 약 10년 다산이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40세, 1801). 대역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했는데 이때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주모였다.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思宜齋)라는 이름을 붙이고 ‘네 가지 마땅함’ 즉 “생각은 맑아야, 용모는 장엄해야, 말은 과묵해야,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초기의 엄혹한 감시와 압박이 조금씩 풀리면서 다산은 1808년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초당은 제자들과 함께 학업에 정진하는 연구공간이 되었으며, 방대한 저술을 낳는 곳이 되었다. 다산의 제자에는 읍중시절에 수학한 제자(읍중제자)들과 다산초당에서 수학한 제자(다산 18제자)들이 있다. 다산의 제자들은 다산의 저술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다산은 4서 6경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 연구서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마쳤다.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欽欽新書)』는 고향집에 돌아가 저술을 마친다.

 
   

18년 유배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간 다산은 저술의 수정보완을 계속했다. 한편, 소론계의 석천(石泉) 신작(申綽), 노론계의 대산(臺山) 김매순(金邁淳),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등과 같은 석학들과 학문 교류를 했다. 다산은 회갑 때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썼는데, 여기서 자신의 호를 사암(俟菴)이라 했다. 이는 “백세 이후 성인을 기다려도 미혹됨이 없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이름이다. 학문적 자부심일 수도 있고, 훗날에 대한 기다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1836년 회혼일(回婚日)인 2월 22일(양력 4월 7일) 회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Ⅱ. 강진 유배생활과 업적                                                                                                                               
1800년 6월 일세의 군주 정조대왕이 갑자기 붕어하자 의지하거나 보호해줄 세력이 없던 다산은 ‘신유교옥’(辛酉敎獄) 이라는 큰 위기를 맞는다. 1801년 천주교인을 탄압하던 대박해사건인 신유교옥은 다산의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었다. 다산 자신의 표현대로 동복의 3형제가 감옥에 갇히고, ‘일사이적’(一死 二謫)이라는 용어대로 셋째형 정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의 기나긴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때 다산의 나이 40세였다. 처음에 경상도 포항근처의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가 겨울에 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다른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801년 11월 22일 나주 북쪽 5리 지점인 밤남정 3거리에서 다산은 둘째형 정약전과 헤어졌다. 형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떠나야 했다. 강진에 도착한 다산의 첫 번째 발언이 기록으로 전한다. “이제 나는 겨를을 얻었다. 하늘이 나에게 학문을 연구할 기회를 주었다. 벼슬하느라 당파에 시달리느라 책도 못 읽고 저술도 못했는데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학문연구에 몰두하자!” 엎어지고 넘어져도 좌절하거나 절망할 줄 모르던 다산, 춥고 배고픈 유배생활에도 굽히지 않고 그는 다시 일어나 학문적 대업을 완성할 용기를 얻어냈다. 강진 읍내 동문 밖 샘거리에 있는 주막집 노파가 제공해준 오두막집 뒷방 하나를 연구실로 삼고 바로 주역과 상례(喪禮)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거처하는 방 이름도 근사하게 ‘사의재’(四宜齋)라 명명하고 학문연구에 침잠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는 스님들의 안내로 강진 읍내 뒷산에 있는 고성사라는 절간으로 옮기고, 군동면의 제자 이학래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경전공부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시절 다산은 읍내의 신분이 낮은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강진 읍내에 거주한지 8년만에 『주역』과 『상례』에 대한 연구가 대체로 마무리 되었고 1808년 봄에는 다산학의 산실인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안주하면서 그의 경학(經學) 연구서의 대부분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만덕산의 줄기 다산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천여 권의 책을 구비하고 4서6경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1816년경에는 경학을 대체로 마쳤다. 1818년 해배되기까지의 마지막 기간에는 경세학(經世學)에 마음을 기울여 『경세유표』· 『목민심서』등을 저술하였고 미처 끝내지 못한 『흠흠신서』는 고향집에 돌아와 저술을 마쳤다. 유배기간인 18년 동안, 경학과 경세학을 연구하던 기간 중에도 다산은 수많은 서정시 및 사회시를 지어 19세기 초반 강진일대의 풍속과 세태를 읊으며, 압제와 핍박에 시달리던 농어민의 참상을 눈물어린 시어로 대변해주었다. ‘애절양’(哀絶陽) 등 대표적인 비판시들이 그 시절에 저작되었다. 특히 18제자를 양성하여 ‘다산학단’을 이룩한 다산학의 전수는 실학사상이 후인들에게 전승되어지는 일대 학술문화 운동의 절정이기도 했다. 이른바 ‘다신계’(茶信契)라는 결사를 통해 학술단체가 형성되어 조선후기의 사상과 학술경향의 변화에 큰 몫을 해주었음은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자서전격인 자찬묘지명에 열거한 것처럼 다산의 저술집은 경집(經集) 232권을 비롯하여 문집 260여 권을 합해 500권에 이르고, 해배 이후 정리한 저술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많은 저술을 완성했다.

 


Ⅲ. 다산의 가르침과 사상

 

다산은 제자 정수칠(丁修七)에게 교훈으로 준 글에서 “경전(經傳)의 뜻이 밝혀진 뒤에야 비로소 도(道)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 도를 얻은 뒤에야 비로소 심술(心術)이 바르게 되고, 심술이 바르게 된 뒤에야 덕(德)을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경학(經學)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하여 학문의 기본이 경학에 있음을 말하였다. 다산은 경전의 뜻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생애를 바쳐 232권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연구서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혹 선유(先儒)의 학설에 따라 뜻이 같은 무리이면 두둔하고 뜻이 다른 무리이면 공격하여 감히 의논조차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모두 경전을 빙자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무리들이지, 진심으로 선(善)에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아니다.” 라고 부연하여 교조적인 성리학의 주자학설(朱子學說)이나 퇴계 ? 율곡 등의 성리설에는 반대의견을 봉쇄했던 잘못된 학문풍토를 냉혹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래서 다산은 성리(性理)이론으로 사서육경을 해석한 주자학에 반대하여 실학적 이론으로 사서육경을 재해석하는 위대한 다산학을 이룩하게 된다.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설을 비판하여 행위와 실천이 담보되는 다산경학(茶山經學)의 새로운 학문 세계를 열어놓고 있었다. 중세 “2천년 장야(長夜)”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긴긴 2천년의 밤에 잠겨있던 관념의 세계를 경험과 행위의 세계로 열어젖혔다고 감히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한 대목이 그런 연유에서 나오게 된다.

이런 경학연구는 그 목표가 수신(修身)과 수기(修己)에 있었다. 학문의 본질인 제 몸을 닦고 자신의 사람됨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경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학문의 두 번째 목표는 치인(治人), 즉 남에게 봉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기름인데, 그것은 남에게 봉사하는 일이자 세상을 올바르게 경영하기 위한 실력을 닦는 일이니, 바로 경세(經世)에 해당하는 학문이다. 즉 정치 ? 행정 ? 경제 등의 구체적인 나랏일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실력배양의 학문인 것이다.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 등 경세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경주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경학 공부와 경세학 공부를 함께 완성해야만 본(本)과 말(末)이 구비된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함양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다산은 경세학의 기본 목표를 ‘개혁’이라는 두 글자에 두었다.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자”(新我之舊邦)라는 켓치프레이즈가 말해 주듯, 썩고 병든 나라를 고치고 바꾸는 데부터 경세학은 시작된다고 믿었다.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않는 한 세상을 경륜하는 일은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다산의 뜻이었다. 다산의 사상을 총괄해보면, 새로운 경학논리로 인간 사고(思考)의 틀을 바꾸어 행하고 실천하는 행위의 논리로 무장하여 남을 도울 수 있는 경세학의 능력을 길러 나라와 세상에 봉사할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두 분야를 통해 성과가 나오려면 결론적으로는 국부의 증진인데, 이 국부의 증진에 가장 기여할 수 있는 길이, 과학기술의 개발에 있다고 여기고 과학기술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개발이 최종적인 결론임을 강조하는데, 그런 내용이 바로 다산의 사상이다. (「기예론」. ‘이용감’설치를 참조)


Ⅳ. 목민심서를 통한 다산의 가르침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고 역사가 달라졌지만, 기본적인 논리나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 목민심서는 본론과 각론으로 되어 있다. 각론은 중앙정부의 6조(六曹)조직처럼 지방정부에도 육전(六典)의 조직이 있기 때문에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육개부서에서 조치해야 할 행정지침이다. 목민심서 48권에서 이 각론을 제외한 분야가 본론이다. 이런 본론 중에서도 핵심 본론은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의 세 편에 들어 있다. 율기 6개 조항의 핵심은 청심(淸心)조항이다. “청렴이란 공직자의 본질적인 임무다. 모든 착함의 근원이요 모든 덕의 뿌리이다. 청렴하지 아니하고는 고위공직자 노릇할 사람이 없다. (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不廉而能牧者 未之有也 : 淸心) 라는 다산의 말대로 공직자는 청렴으로 시작해서 청렴에서 끝나야 한다. 청렴한 사람이 진짜 큰 욕심쟁이라고도 했다.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려는 공직자는 청렴해야만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대탐필염(大貪必廉)이 바로 그런 의미다.

두 번째는 봉공이다. 봉공편의 핵심은 수법(守法)조항이다. 사리에 합당한 법은 조건 없이 지켜야 하나 문제가 있는 법은 융통성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 주의 할 대목이다. 상사의 명령은 따라야 하지만 사리에 맞지 않거나 부당한 명령은 단호히 거절하라는 조목도 수법조항에서 관심을 보여야 할 부분이다. 민생과 국법이 충돌하거나 준법의 기본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는 “민생도 중요하게 여기고 국법도 존엄하게 해야 한다. (以重民生 以尊國法)” 라는 부분을 사려 깊게 해석해야 한다. 법만 높이다가 민생이 파탄 나서도 안 되고, 민생만 위하다가 국법의 존엄성이 무너져도 안 된다는 점이다. 정당한 국민의 저항권은 철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다산의 민권의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황해도 곡산도호부사 시절에 일어난 이계심(李啓心) 사건에 대한 명재판을 상기해야 한다. “백성들이 제 몸을 이롭게 하는데만 꾀가 많아 자신들이 당하는 폐해에 항의할 줄을 모른다”(民工於謀身 不以?犯官也)라고 하여 목민관들이 밝은 정치를 펴지 못하는 이유를 그렇게 설명했다. 다산이 곡산부사 재직 시 관의 잘못에 대중시위를 선동한 이계심을 무죄 석방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마지막으로 애민편이다. 애민편의 핵심은 『진궁』(振窮)조항이다. 백성을 사랑하라는 조항에서 백성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가난하고 힘없으며, 병들고 약하며, 천하고 지위 낮은 사람이 바로 민(民)이다. 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생각을 기울이는 일이 바로 ‘애민’이라는 것이다. 사궁(四窮 : 鰥寡孤獨)을 보살펴야 한다. 노인·어린이·장애인이나 중병에 걸린 사람, 상을 당한 집안, 재난을 당한 집안을 보살펴주는 일이 바로 애민이라고 다산은 정의하였다. 양로(養老)에서는 걸언(乞言), 진궁에서는 합독(合獨)제도 같은 사회보장제도도 활용하라고 했다. 공직자들은 최소한 이런 다산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인들의 기탄없는 건의사항을 받아들여 잘못된 행정을 시정하는 것이 걸언이고, 홀로 사는 남녀노인들에게 재혼하는 길을 관(官)에서 열어주는 일이 합독이다.


Ⅴ. 결론

 

다산은 개혁가였고 변화주의자였다. 현상을 그대로 두고 역사발전을 기대하는 일은 연목구어다. 공직자는 고치고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지부동의 공직자는 나라를 망치는 주범이다. 목민(牧民)의 목(牧)의 의미부터 명확히 인식하고 공부에 임해야 한다. 승냥이나 호랑이의 피해로부터 어린 양들을 보호해주는 일이 목이라고 다산은 정의했다. 불쌍한 백성들을 보호하려면 토호들의 횡포부터 막아야 한다. 이런 것이 다산의 목민정신이다. 목민정신에 투철한 공직자가 많아지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선진국에 진입할 것이다. (土豪武斷 小民之豺虎也 去害存羊 斯謂之牧)

 

 

 


강연자 프로필

학력
-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사
-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
-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경력
-제 13,14대 국회의원 역임
-한국학술진흥재단 이사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및 이사장   
-5·18 기념재단 이사장       -한국고전번역원장

현재
-다산연구소 이사장          -고산서원 원장
-성균관대 석좌교수          -실학박물관 석좌교수

저서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을 가다(조선의 의인들)』, 『다산 기행』,『풀어쓰는 다산이야기 1,2』,『다산 정약용의 일일수행 1,2』등 다수

역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다산 산문선』 등 다수